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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 날은 큰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
내 번호는 어떻게 아셨는지, 엄마가 괜찮냐고 하셨다

"너는 같이 사니까 알잖아, 엄마 어때?"

내가 집에서 나와 따로 살고있는 걸 모르시는 것 같았다
엄마를 본지도 오래됐고, 연락한 지도 오래되어
무슨 얘기를 하시는지 잘 몰랐지만 대충 둘러대자
니가 엄마랑 잘 얘기를 해봐, 그 정도면 많이 아픈거야- 라고 하셨다
실제로는 별 일 없이, 큰어머니 혼자 상상걱정을 하고 있었던 거였지만.
큰어머니의 전화를 계기로, 감정의 동요 없이 엄마를 만나고 왔다


엄마도 시댁식구들을 반가워하지 않는 여자로 살았지만
한 번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
5남매 중 첫째로 태어나서
동생들 뒤치다꺼리 하느라, 엄격한 아버지 눈치보느라
답답했던 때가 많았는데
시집을 와서 좋았던건, 새 식구가 생겨서 참 좋았다고.
막내며느리로 들어가서
시아버지로부터 예쁨도 받았고
왁자지껄한 분위기로 명절 지내는게 싫지 않았다고.

사람이라는 게, 인연이라는 게, 정이라는 게 그런걸까.
미운 정, 고운 정, 그런 것들.

얼마 전 치매걸린 노인 한 분이, 당신 딸이 아이를 낳아 미역국을 끓였는데
딸 있는 데를 못찾아가서 헤매다 경찰이 찾아줬다는 얘기를 읽었다
자기 이름도, 딸 이름도, 집 주소도 전화번호도 기억을 못하는데
우리 딸 미역국 먹여야 한다고, 이미 다 식어버린 미역국을 들고
길가를 서성였다던.


많이 원망했고 또 도망치고 싶었던 날들에
왜 진작 도망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.
조금 더 일찍 도망쳐나왔더라면
조금 더 일찍 마음정리를 하고, 오래도록 미워하지 않았을텐데

그래도 이만하길 다행
이라는 생각이 든다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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어제는 귓속을 만졌다
자꾸 귓속을 만지고 싶었다

오래 전에 잊은 버릇인데, 왜 잊혀졌는지는 모르겠다
엄마가 절실히 필요한 시절에 잠들기 전이면 꼭, 귓속을 만졌다
귓속을 만지고 싶어했다

내 귀는 꽤 작은 편이라, 어릴 땐 면봉도 잘 들어가지 않았고
가끔 엄마 무릎을 베고 귀를 파는 호사를 누릴 땐 성냥으로 살금살금
다 큰 지금도 면봉이 여유있게 드나들지는 못한다

작은 귓구멍으로 새끼손가락을 넣으면
손가락 끝에 닿을 듯 말 듯한 뭔갈 느낄 수 있었다
그걸 좀 더 제대로 만져보고 싶어서
손가락질을 더 열심히, 끈질기게 하다 잠들면
아침엔 귀에 찐덕한 게 흘러나와있곤 했다
잠에서 깨자마자 양말을 신던, 늘 아주 뜨거웠던 방
화장실은 후레쉬를 들고 밖으로 나가야했고
끓인 물을 수돗물에 섞어 씻었던 작은 판잣집.

지금 사는 집은, 이사한지 갓 한 달이 넘었는데
여러가지가 좋다
일단, 예전집은 2층이었고 창문으로 하늘이 보인데다
은은하게 전철 다니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 좋았다
다만 방범창이 없어 조금 불안했는데, 방범창이 있었대도
창을 감상하기 삭막했을 것 같다

지금 집은 4층이고, 방범창 없이도 불안하지 않게 창을 감상할 수 있다
베란다가 있고 그 외에 창문이 2개나 더 있어서,
빨래를 방 안에 널지 않아도 되고
오늘같은 날씨라면 아침에 넌 빨래가 저녁에 말라있다
물론 얼마 전 바퀴벌레 등장으로 식겁하긴 했다(그래서 바퀴벌레약을 사왔다)
부엌이 좁고 조리대가 없지만, 도마를 놓을 수 있게 스텐레스봉을 사두었다
(물론 아직까지 요리를 해보지 않았다 간단한 샐러드 외에)
천장이 예전집보다 높아서 더 넓어보이고, 실제로도 조금 넓은 것 같단다
두 명이나 누울 수 있으려나, 싶은 작은 평수지만
나 하나 쉬기엔 부족하지 않다
마음 편히 알몸으로 돌아다닐 수 있으니, 그거면 됐다

아직 세간살이를 갖추지도 못하고
정리도 덜 되서 꼭 피난이라도 온 것 같은 꼬라지지만
벌써, 조금씩 정이 드는 것 같다


누가, 여건상 고치지도 바꾸지도 못한 채 십 년 넘게 쓰던 냉장고를 버리면서
울컥했다는 트윗을 봤다
물건에 대한 애착이 꽤 있는 편이라, 저 얘기에 한 편으론 이해가 가면서
정말 우리는 물건에 정이 드는걸까, 하고 생각해봤다
물건이 우리에게 정을 느끼게 해줄 수 있는 존재일까, 과연.

손때 묻은 가구나 소지품을 보고
몇 년을 써왔구나, 이거 생겼을 때 엄청 좋아했었는데,
혹은 이걸 그 누구도 참 좋아(싫어)했는데. 같은 감상을 가질 것 같다
말하자면 추억이 어린다
누구랑 자주 다니던 골목이라던가, 자주 먹었던 음식이라던가.
그런 건 일종의 매개물이지 그 자체가 어떤 감흥을 주진 않는 듯 하다
그러니까, 나의 (힘겨웠을) 과거를 버티면서 그 시간을 함께한 동지같은 존재감이 아닐까
현실감을 주는 건 커다란 공간이나 큰 사건이 아니라, 작고 사소한 것들이니까.


이 집으로 이사를 오게 된 때가 장마철이었고, 예상치 못한 이사였던데다
여러가지 일들이 겹쳐 정신이 없었는데
다행히 이사하는 그 날 이삿짐을 옮기던 때에 비가 그쳤고
좋은 집주인을 만난 것 같다(말씀이나 걱정이 좀 많으신 듯 하지만)

예전 집 창밖으로 가로등이 하나 보였는데
작년 겨울,
온기가 있는 방 안에서 아침을 지어먹으면서
첫눈이 내리는 걸 봤던 기억이 난다
정말 다행스럽구나.. 싶었던.
저녁 가로등불빛을 받아 반짝이는 눈송이들이
무척 아름다웠고, 환상적인 동시에 굉장히 안도감을 주는 실재였다

지금 사는 곳에서는 아직 안도나 안정을 못느끼지만
곧 그렇게 되지 않을까,
벽지도 위화감 없는 꽃무늬고 붙박이장도 있고.
신발장은 없지만 귀여운 세면대 수도꼭지와 샤워기가 있다


여러가지가 좋다
좋게 생각하려는 중이다
연습 중이다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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나를 내보이는 연습, 나를 드러내는 연습을 해봐야겠다
진지하게.

머릿속에서 우르르쾅쾅 하는 생각들, 얘기들을
예전엔 블로그로 이리저리 쏟아내기도 했는데
그러면서 스트레스를 풀기도 했는데
지금은 그냥, 꼭꼭 잠궈두고만 있는 것 같다

어째서일까.
아마 자신을 초라하다고 여기는 순간들이 잦아지던 시절과 맞물리는 것 같다

말을 줄이려고 하다 말하는 법을 까먹어버렸다는 걸 알아버린 어느 날이 떠오른다
이러다 난 존재하지도 않는 인간이 되버릴 것 같다

솔직하고 싶어서, 지인들이 모르는 공간에 모르는 이름으로 글을 쓰는 것이
유일한 숨구멍이었는데. 그 숨구멍을 왜 막아버린 건지 잘 모르겠다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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